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제니 드 몽티조 (문단 편집) === 프랑스 황후 시절 === 샤를 드 모르니 공작의 예측대로 외제니 황후는 제2제정기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패션을 비롯한 유행은 모두 그녀로부터 시작했다. 외제니 황후는 보나파르트 황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보석을 광적으로 좋아했고 그녀의 보석 컬렉션은 오늘날 루브르에 남아 있다. 그녀는 한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 덕분에 럭셔리 브랜드가 호황을 이뤘다. 또한 황후가 여행을 떠날 때 드레스와 보석, 향수들을 실어나를 가방을 납품한 [[루이 비통]]을 총애해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포장 회사를 개업하도록 도와줬다. 황후 시절에 [[섭정]]을 3번 했는데, 첫번째는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두번째는 1865년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령 알제리]] 순방, 마지막은 1870년 [[보불전쟁]] 때이다. 섭정으로 [[내각]] 회의도 직접 주재했다.[* 중요한 정책의 경우 [[전보]]를 활용해서 남편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당대에는 황후가 너무 국정에 끼어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정치력 덕분에, 프랑스에서 외제니 황후에 대한 평가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조제핀 황후]]의 [[상위호환]] 버전이었다.[* 이건 외제니가 기본적으로 조제핀 황후보다는 경제력, 계급 등에서 우세한 귀족 집안 출신이어서 사치를 부려도 자기 [[내탕금]]에서 먼저 지출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말년에 프랑스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외제니 개인 재산과 프랑스 황실 재산이 뒤섞여 법적인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외국 왕실의 공주와 결혼을 시도했을 때, 이에 대한 민중들의 반응은 "[[네 다음|네, 다음]] [[마리 루이즈]]."였다.[*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가 [[조제핀 드 보아르네|조제핀 황후]]와 이혼한 후 맞아들인 두번째 황후였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의 오랜 적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의 딸이자, [[프랑스 혁명]] 때 구 체제의 상징으로 몰려 처형당한 그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손녀였다. 이로 인해 마리 루이즈는 결혼 초기부터 프랑스 국민들에게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비난받으며 황후로서 별로 지지받지 못했고, 나폴레옹 역시 대외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몰락이 시작됐기에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을 정치적 실수로 보기도 한다.] 결혼 후 외제니 황후의 건강은 유산을 계기로 크게 나빠져서, 장남 출산 후 의사들이 둘째 출산은 곧 사망이라는 경고까지 했다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 3세와의 잠자리 역시 기피하여, 나폴레옹 3세는 후계자를 얻을 때까지만 외제니와 잠자리를 했다고 한다. [[수에즈 운하]] 완공식 참석을 위해 [[이집트 왕국]]에 남편과 함께 국빈 방문 했을때 이집트 군주 [[이스마일 파샤]]와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수에즈 운하를 가기 전에 1868년 [[돌마바흐체 궁전]]을 방문했다가 [[오스만 제국]] [[압뒬아지즈]] 황제의 형제 중 한명의 팔짱을 끼고 정원을 둘러보다가, (외간 여성의 사적 공간 출입에) 분노한 발리데 술탄[* 오스만 제국에서 [[황태후]]의 호칭.] 페르테브니얄에게 뺨을 맞아 국제 분쟁을 번질 뻔 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문제는 나폴레옹 3세에 관한 책들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다르게 묘사해서 무엇이 진실이 알기 어렵다. 앞선 서술은 John Freely의 "Inside the Seraglio: Private Lives of the Sultans in Istanbul"에서 나온 내용이며, 데스몬드 수어드의 외제니 황후 평전에서는 뺨을 때린 것이 아니라 배빵(!)을 갈겼으나 이내 오해가 풀렸다고 기술되어 있다. 프랑스 출판물에서는 외제니 황후가 발리데 술탄에게 프랑스식으로 비쥬를 했다가 놀란 발리데 술탄에게 얻어맞았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https://ottomanladies.tumblr.com/post/181473748779/why-did-pertevniyal-slapped-empress-eugenie-witha|#]] [[스당 전투]]에서 남편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보좌관에게 차라리 황제가 자결했어야 한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